1950년대 한국 사회와 서울의대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거의 모든 것이 후진적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만 35년 동안 가혹한 억압, 수탈, 차별에 시달렸다.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찾아온 남북분단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분단’이라고 규정하더라도 고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천 년 동안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갈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극심한 인명 피해와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 냉전적 분단체제를 가져왔다. 그 후 독재정치, 부정부패, 절대적 빈곤 등 온갖 후진적 상황은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당시 감염병의 유행이 빈번해서 국민들의 건강 전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콜레라, 장티푸스 등 급성 감염병이 삽시간에 휩쓸고 지나가는가 하면, 당시 ‘국민병’이라 불리던 결핵과 기생충병의 위력도 대단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병원 시설이 상당수 파괴되었고 의료진도 부족했기에 국민들의 근심과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서울의대와 부속병원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의료기기와 약품을 대량으로 가져갔고, 교수진과 의료진의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실종, 혹은 납북되었다. 전쟁 중 군의관이 되어 전상병 치료에 헌신한 교수진의 복귀도 정부 방침 등 여러 사정으로 늦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서울의 대학과 병원에 돌아온 교수진과 학생들은 끔찍했던 전쟁의 상흔에 짓눌려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하기가 어려웠다.
한마디로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전후 복구와 함께 의학, 의학 교육 방식을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기적처럼 실제로 일어났다. 바로 ‘미네소타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란 1954년 9월부터 1961년(행정대학원은 1962년)까지 총 6년 8개월 동안 미국 정부가 서울대학교에 시행한 교육원조 사업을 말한다. 이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제3세계 국가들에 지원한 교육원조 사업 중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대규모였다. 특히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교육, 연구, 진료 등 모든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설 복구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시행으로 1954~1961년 서울의대 및 부속병원의 건물 보수 및 시설 확충을 위해 695,200달러가 투입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의대 건물에 14,700달러, 부속병원에 525,700달러, 간호학과에 154,800달러가 사용되었다.
의대에서는 기초교실 건물의 지붕을 개수하고 수도 및 전기시설을 보수했다. 동물실, 강당과 복도 등도 보수했다. 기초의학 건물 3층 옥상에 도서관을 증축하고, 1955년 이후 매월 60여 종의 의학잡지를 지원받았다. 병원에서는 일부 병동의 증축과 난방, 수도, 전기설비 등을 보수했다. 특히 1959년 수술장과 방사선과(영상의학과)를 증축했고, 1958~1959년 간호학과 건물과 간호사 기숙사를 신축했다. 아울러 간호고등기술학교가 의과대학 간호학과로 승격되었다.
의대와 병원의 교육연구 및 진료용 기기 도입을 위해 약 614,500달러가 투입되었다. 기초의학 부문에 231,600달러, 임상의학 부문에 381,600달러가 배정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최신식 기기들을 도입하여 의대의 교육 및 연구 시설을 대폭 보강했고, 부속병원의 진료 시설들을 현대화했다.

미국인 자문관들의 활약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에는 의과 부문 7명, 간호 부문 3명, 병원행정 부문 1명 등 총 11명의 자문관이 파견되었다. 총괄자문관 멀로니(Maloney), 매츄(Matthews, 마취과학), 쉬머트(Schimert, 외과학), 골트(Gault, 내과학), 의과부문 자문관 플링크(Flink, 내과학), 브라운(Brown, 생리학), 버그런트(Berglund, 소아과학), 간호부문 자문관 로우(Low), 윌리엄스(Williams), 줄리언(Julian), 병원행정 자문관 미첼(Mitchell)이었다.
자문관들은 강의 및 진료, 회의 참석 및 권고안 제시, 자문 및 상담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의대의 강의 방식과 관행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고, 현장에서의 임상 교육을 강조하고 주문했다. 미국식 교육 방법과 강의 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서울의대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매주 학장 및 병원장과의 연석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병원행정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다.

교수진·대학원생들의 미네소타대학 연수·유학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의대 교수진 및 대학원생들의 미국 미네소타대학 연수 및 유학이었다. 1955년 9월 제1진 12명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부속병원장이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진병호를 필두로 감염내과학의 선구자 전종휘, 조교수이던 서병설(기생충학), 홍창의(소아과), 백만기(이비인후과) 등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생인 이상돈(생리학), 이호왕(미생물학)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대학은 1851년에 설립되었다. 1950년대에는 학생 수가 2만여 명에 달했으며, 미국 10대 주립대학에 포함되는 종합대학이었다. 특히 미네소타의대는 역사, 시설, 교수진의 학문적 권위 면에서 당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이었다. 심장학과 심장수술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였다.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도 미네소타의대와 결연을 맺고 있었다. 당시 미네소타의대 부속병원의 규모는 700여 병상이었고 시립병원, 보훈병원, 기독교병원 등과 교육병원으로서 결연을 맺고 있어서 학생 교육과 인턴, 레지던트의 수련을 수월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의대 교수진과 대학원생들의 연수과 유학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모두 77명이 참여했다. 연수·유학 프로그램은 단기 과정과 학위 과정으로 운영되었다. 단기과정은 3개월에서 1년 동안 주로 시찰 및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간부진과 시니어급(부교수 이상) 교수들이 이에 해당되었다. 조교수와 대학원생들은 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은 2년 이상 체류하면서 강의를 듣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임상 분야 조교수들은 외래진료, 수술 등을 견문하거나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 연수와 유학에 참가한 전체 77명 중 33명이 신진 연구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젊은 조교수들과 대학원생들에게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이례적이고 신선한 조치였다. 단기적 성과보다는 미래의 교수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기본 취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총체적 도약

미네소타의대 연수·유학을 다녀온 교수들을 통해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에 미국식 의학 교육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다. 강의 위주의 의학 교육은 시청각 교재를 이용한 증례 위주의 토론방식으로 바뀌어갔고, 임상교육도 베드사이드 교육 등의 실전 훈련이 보편화되어 보다 풍부한 교육 수련이 시도되었다. 1957년 학생실습제도, 1958년 인턴제도, 1959년 레지던트제도가 정착되어감으로써 제도적으로도 현재의 수련의제도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현대의학의 새로운 동향도 급속히 소개되었다. 우선 임상과목들이 재정립되었다. 외과는 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로 분화되었고, 마취과는 독립되었다. 임상병리과가 신설되었다. 미네소타의대 연수를 통해 내과 김응진 교수는 당뇨병학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생 이호왕은 미생물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암 연구 및 진료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 외과에서는 미국식 의학 교육 방법을 벤치마킹하여 Tumor clinic을 시작했다. 위암에 대한 한 주간의 증례 보고와 특이한 사례들을 보고하는 시간으로서, 당시 희귀질환이자 난치질환이었던 암을 일상적으로 대하는 통로가 되었다. 아울러 진병호 교수는 항암화학요법을 시작하여 항암제 연구의 개척자가 되었다. 신경외과에서는 심보성 교수가 미네소타의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1957년 9월 뇌수막종에 대해 국내 최초로 개두술 및 종양 제거술을 시행했다. 산부인과에서는 김석환 교수를 중심으로 부인과 병리검사실(Pathology Lab)을 설치하고 국내 최초로 부인암 조기진단사업을 일상화했다. 소아과 또한 홍창의 교수가 심도자법을 시행하고, 흉부외과 이영균 교수와 연계하여 소아 심장수술을 활성화했으며, 국내 최초로 백혈병을 비롯한 소아 악성종양에 대해 항암요법을 시도했다. 이비인후과에서도 백만기 교수가 1957년 국내 최초로 후두전적출술과 경부곽청술을 시행했다.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 한국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독재정치와 경제적 빈곤으로 우리나라 전체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던 1950년대 중후반,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의학과 현대적 의학교육방식을 본격 도입하여 교육, 연구, 진료를 크게 업그레이드했다. 아울러 1960~1970년대 한국 의학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인력을 키우는 동력을 확보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서울의대와 서울대병원 역사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한눈에 보는 타임라인

1950s

1954. 9. 28.

‘미네소타 프로젝트’ 본계약 체결

1957년 9월 30일까지 의대, 공대, 농대 등 서울대학교의 3개 단과대학에 교환교수 프로그램, 시설복구, 장비 지원 등의 사업에 모두 180만 달러를 지원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출범

미네소타 대학 총장 서한, 1954 Ⓒ 서울대학교 기록관

1954. 10.

1954년 10월 주한 수석자문관인 슈나이더(Arthur E. Schneider) 한국 주재

사업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업이 종료되는 1961년 6월까지 6년 8개월 동안 한국 주재

1954~1961

서울의대 및 부속병원의 건물 보수 및 시설 확충

의대 건물에 14,700달러, 부속병원에 525,700달려, 간호학과 154,800달러 사용

미네소타 대학교와 기술원조 협조 협정 체결, 1954. 9. 5. Ⓒ 서울대학교 기록관

1955. 9.

ㆍ제1진 12명의 서울의대 교수진 및 대학원생들이
미국 미네소타대학 연수 및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출발

당시 부속병원장이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진병호를 필두로 감염내과학의 선구자 전종휘, 조교수이던 서병설(기생충학), 홍창의(소아과), 백만기(이비인후과) 등.
그리고 대학원생인 이상돈(생리학), 이호왕(미생물학) 등도 포함
~ 1961년까지 지속, 총 77명 참여

ㆍ건물의 지붕을 개수하고 수도 및 전기시설을 보수

ㆍ동물실, 강당과 복도 등도 보수

홍창의 조교수(1955, 여의도비행장에서 미국으로 떠나며)

1955년 이후

기초의학 건물 3층 옥상에 도서관을 증축하고 매월 60여 종의 의학잡지를 지원받으며 의과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점차 갖추게 됨

1956

일제 말기에 착공했지만 중단되었던 서1병동(부인과 병동)과 서2병동(소아과 병동)이 들어 있는 2층 건물 완공. 난방, 수도 및 전기설비 보수, 복도 개수, 도로 포장 등

1957

의과대학에 미국인 자문관 파견 본격화

1956~1961년 의과대학에 파견된 미국인 자문관은 총 11명, 근무기간을 통산하면 158.5개월(평균 14.4개월)

1957. 2. 11.

추가 계약 체결

사업기간을 1959년 9월 30일까지 2년 연장, 행정대학원을 지원 대상에 포함하는 계약
ㆍ진병호 교수 항암화학요법을 시작해 항암제 연구의 개척자가 됨

1957. 9.

의과대학에 미국인 자문관 파견 본격화

ㆍ신경외과 심보성 교수 국내 최초로 개두술 및 종양 제거술 시행

ㆍ산부인과 김석환 교수를 중심으로 부인과 병리검사실(Patuology Lab) 설치, 국내 최초로 부인암 조기진단 사업 일상화

ㆍ소아과 홍창의 교수가 심도자법 시행, 흉부외과 이영균 교수와 연계하여 소아 심장 수술을 활성화, 국내 최초로 백혈병을 비롯한 소아 악성종양에 대한 항암요법 시도

홍창의 조교수의 미네소타대학 연수 증서(1957)

오순섭 수의대 학장의 미네소타 대학교 이수증 및 승인서류,
신광순 명예교수 기증, 1957
Ⓒ 서울대학교 기록관

1957

이비인후과 백만기 교수 국내 최초로 후두전적출술과 경부곽청술 시행

1957

학생실습제도 실시

1958

인턴제도 실시

1958

미국 미네소타 대학 교수 학생 미술작품 교환 전시회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교는 교환 미술전시회를 열어 문화교류를 다짐. 1957년 서울대학교 교수와 학생들의 미술전시회가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열렸으며, 이듬해에는 미네소타대학교 교수와 학생의 미술 작품이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전시됨.

미국 미네소타 대학 교수 학생 미술작품 교환 전시회, 1958 Ⓒ 서울대학교 기록관

1958. 12. 15.

703평의 간호학과 건물 신축

1959. 3.

최초 인턴 수료자 18명 배출

미네소타의대 연수 중 미니애폴리스에 모인 교수진(1959년경)

1959

레지던트제도 실시 (현재의 수련의제도의 원형 창출)

1959. 4. 1.

대학 과정의 간호학과 신설

1959

수술장 건물과 방사선과(영상의학과) 증축

서울의대 전경(1950년대 후반)

1959. 12. 12.

976평의 간호원 기숙사 건물 신축

미네소타대학에서 온 시찰단(1950년대 후반)

1960s

1960

전문의 시험을 통해 자격을 부여하는 ‘전문의 자격고시제’ 마련

진병호 교수(1960년대 초반, 항암제 연구)

1961. 3. 31.

부설 간호고등기술학교 폐교

아놀드 박사 방문 기념 단체사진, 신광순 명예교수 기증, 1960년대 초 Ⓒ 서울대학교 기록관

1961

ㆍ약국창고, 조제실 증축, 새로운 취사장과 세탁장 건물 완공
: 미국에서 도입한 취사, 세탁 시설이 설치되어 병원시설이 빠른 속도로 현대화

ㆍ의대와 병원의 교육연구 및 진료용 기기 도입을 위해 약 614,500달러 투입
: 기초의학 부문 231,600달러, 임상의학 부분 381,600달러 배정

ㆍ강의 위주의 의학 교육에서 시청각 교재를 이용한 증례 위주의 토론 방식으로 변화

ㆍ임상 교육도 베드사이드 교육 등의 실전 훈련이 보편화되며 보다 풍부한 교육 수련 시도

ㆍTumor clinic 종양 클리닉 시작 : 위암에 대한 한 주간의 증례 보고와 특이한 사례 보고

1962. 6. 30.

서울대학교에 주재하던 미네소타 고문 슈나이더 박사가 본국으로 귀환함으로써 프로젝트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