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도서관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서울의대가 ‘우리나라 의학의 전초기지’라는
자부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60년 넘게 의료와 교육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처음서울의대에 입학하셨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긴 시간 가운데 가장 깊이 남은 기억은 무엇인가요?

서울의대에서 내과 교수로 재직했던 최규완 명예교수입니다. 환자를 진료하고, 학생을 가르치며, 연구에 전념해 왔습니다. 대통령 주치의와 의료원장, 이사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공식적인 직책에서는 물러났지만, 지난 삶을 돌아보며 60년간의 의사 생활을 회고록으로 집필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대에 입학했던 1955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뜻밖에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후 동창회 장학금도 꾸준히 받으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로니에공원의 벤치에 앉아 사색하던 풍경이 가장 먼저 그려집니다. 또 동숭동의 중앙도서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마음껏 책을 읽던 순간들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라는 문장은 늘 자부심이었는데요, 그 문장이 새겨진 교복과 교모를 쓰고 종로 거리를 걷던 기억이 지금도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의학도서관 건립기금 2억 원을 기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을까요?

학생 시절 내내 도서관과 장학금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전공서를 사는 일조차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공부를 이어준 것은 동창회의 장학금과 도서관이었습니다. 그때 다짐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면 가장 먼저 갚을 빚은 도서관과 장학금이다.” 그 다짐에 따라 동창회 장학금과 병원에 각각 1억 원씩 기부했고, 의학연구재단을 세워 교수 연구와 환자 치료를 지원해왔습니다. 의학도서관 건립기금 2억 원 기탁은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때의 형편상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내와 자녀 모두 “해야 한다”고 지지해 주었습니다. 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받았던 도움을 후배들에게 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기부로 이어졌습니다.

도서관은 누군가에게 어둠 속의 빛이 되어주곤 합니다. 교수님에게 도서관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가요?

저에게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라, 인생을 붙잡아 준 공간입니다. 책을 살 형편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도서관이라 해도 지금처럼 잘 갖춰진 시설은 아니었습니다. 학장실 맞은편 회의실에 책장을 몇 개 두고 의학 참고서를 비치해 둔 정도였지요. 그래도 제게는 그곳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의학도서관 건립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감사’였습니다. 그 시절의 도서관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이번 도서관이 서울의대의 상징인 ‘진리는 나의 빛’을 모티프로 한 ‘빛의 도서관’ 으로 조성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한 일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의학도서관은 단순한 공부 공간을 넘어, 지식의 저장소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신 의학 서적과 연구 논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의학의 뿌리를 보여주는 역사 자료와 고서까지 폭넓게 보존하길 바랍니다. 디지털 시대라 해도, 종이책이 주는 집중과 깊이는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죠. 서울의대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나라 의학 전체를 이끄는 ‘빛의 거점’이 되길 기대합니다.

교수님께 걸어오신 길 속에서 ‘서울의대’라는 이름은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앞으로 서울의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시나요?

서울의대는 우리나라 의학 교육과 연구를 이끌어 온중심 기관입니다. 학생으로, 교수로, 그리고 지금은 한 명의 동문으로서도, 서울의대가 ‘우리나라 의학의 전초기지’라는 자부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서울의대의 후배들 중에서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가 나오길 바랍니다. 그것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우리나라 의학과 사회 전체의 성숙을 상징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울의대가 필수 진료과와 기초의학, 사회의학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며 세계적인 연구와 교육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한가운데, 새로 태어나는 의학도서관이 든든히 함께하리라 믿습니다.

오랜 시간 제자들을 길러오신 교육자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의학의 본질은 사람의 생명과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일부 전공에 쏠리는 현상이 있지만, 의료는 어느 한 과만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내과·외과·소아과·산부인과 같은 필수 진료과를 함께 지탱하고, 기초의학과 사회의학에도 꾸준한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또한 저는 의사과학자의 길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미국 유학 시절 유전학을 공부하며, 당시 국내에는 거의 없던 분야를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그 경험은 학문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강조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육자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책임 있는 의사, 과학적 사고를 갖춘 의사를 길러내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 믿습니다.

평생 여러 기관과 단체를 통해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오셨습니다. 교수님께 ‘기부와 나눔’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기부가 돈이 많다고 저절로 하게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실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오며 세 가지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에 감사하며 정직하게 나누고, 신세를 진 곳에는 반드시 갚으며, 지금 어려운 이웃과 사회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교회, 동창회, 병원, 연구재단, 의학도서관 등 다양한 곳에 꾸준히 기부를 이어왔습니다. 금액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정성입니다. 기부는 ‘남는 돈을 쓰는 일’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세상에 정직하게 돌려주는 일입니다. 그럴 때 마음이 더 풍요로워지고, 삶이 단단해집니다.

마지막으로, 긴 여정을 걸어오신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름 없이 나눔을 실천해 온 많은 선배와 후원자가 있습니다. 도움을 받았다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도움을 돌려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부가 반드시 큰돈일 필요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꾸준히 나누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기부를 통해 받은 은혜를 세상에 되돌려주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사와 평안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느꼈습니다. 그 길 위에서 가장 든든한 동반자는 아내였습니다. 언제나 “좋은 일은 함께하자”고 말해 주며 조용히 곁을 지켜준 아내가 있었기에, 나눔은 제 인생의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바로 기부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한 의사이자 연구자로 성장하고, 나눔의 전통을 이어가는 서울의대인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회복’을 이끌어 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