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환 교수 흉부외과학교실

시그니처란 ‘내가 가지고 있는, 항상 당연하다고 여기는
보통의 것들을 귀하고 소중한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보통의 것을 소중한 의미로 재탄생시키는 매개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흉부외과학교실 김경환 주임교수는 1998년 교수로 발령을 받은 후, 25년째 심장 수술과 환자 진료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로 수술용 확대 안경인 ‘루페(loupe)’와 ‘호기심’을 꼽았다. 심장 수술은 일정 시간 동안 심장을 정지시켜 최선의 방법으로 안전하게 수술을 마치고 심장을 다시 소생시켜야 하는 고되고 힘든 의업이다.
“심장의 세밀한 해부학적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 질환을 수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숨은 조력자가 ‘루페’입니다.”
김경환 교수는 루페를 통해 2~3배 이상 확대된 심장을 보면 해부학적 구조들이 또렷하게 볼 수 있어 안정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더욱 자신감 있게 수술에 임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10년, 20년 쌓이면 자신의 마스터피스를 만들 수 있다고.
“루페와 호기심은 저의 오늘이 있게 한 키워드입니다. 심장외과 교수로 일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의 연속입니다. 이 가운데에 호기심이 생기는 분야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전문가 또는 그와 필적할 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어렵지만 매우 매력적입니다.”
김경환 교수는 20년째 헬스케어 IT분야 업무와 융합의학기DJD술원장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그가 의과대학의 교수로 발령받은 1998년은 병원의 종이 차트 시스템이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그는 이때부터 병원 전산화 사업에 참여했고, 관련 분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의문점을 하나씩 해결해 가며 병원정보시스템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김경환 교수는 시그니처란 ‘내가 가지고 있는, 항상 당연하다고 여기는 보통의 것들을 귀하고 소중한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매개체’라고 말한다. 또한 목표를 가진 일을 쉼 없이 추진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드는 것은 나의 행복을 넘어 학교, 병원, 사회, 국가 나아가서 인류의 행복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그니처가 필요하다고. 이렇듯 김경환 교수는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희일비보다 중요한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김경환 교수는 3년 전부터 ‘와인 전문가’라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전 세계 주요 와인 산지를 방문해 생산자를 만나고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교육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와인 공부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한다.
“와인을 공부하다 보면 나의 위치를 떠나 사람들과 평등하게 교류할 수 있습니다. 와인 자격증을 딸 때, 와인을 시음하고 그 기법을 쓰는데 정답의 유무는 100점 중 5점밖에 안 돼요. 답에 도달하는 과정을 쓰고, 그 과정이 맞다면 답이 틀려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거죠.”
김경환 교수는 전공과목을 고르거나 연구 분야를 정하는 일련의 과정은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 첫인상, 한 번의 자기 결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말도 들어 보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 시간을 갖고 집중하기를 바랐다.
“제가 독립된 심장외과의로 심장 수술을 제대로 하게 된 것을 2004년부터입니다. 199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4년 정도가 지나서야 제 분야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1년 4개월이 아니라 14년. 수술이나 연구는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에 일희일비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힘든 과들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가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를 제대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실제로 작년 5월부터 의사들의 어려움을 알리고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김경환 교수의 꿈은 해외에서 심장병 환자를 위한 전문적인 봉사를 하는 것, 또 다른 직업을 갖는 것, 와인 전문가로서 더 상위의 공부를 진행하는 것, 새로운 차원의 혁신 심장 수술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는 것 등으로 다양하다. 앞으로 그가 이루어 나갈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다.
유희정 교수 정신과학교실

시그니처란 ‘나의 경험을 쌓고 직조해서
내 삶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시간을 이어주는 것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유희정 교수는 다양한 종류의 발달 장애와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소아 청소년들을 진료하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시그니처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제가 하는 일, 해온 일들을 돌아보면, 저를 정의하는 정체성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인 것 같다”라며, 시계를 오브제로 꼽았다.
“저는 주로 어린 아동들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아동, 청소년기는 짧게 지나가지만 삶의 많은 부분을 형성합니다. 그들이 살아가며 지나는 시간을 성인이 되어 독립하는 시간까지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저를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처음 교수가 되고 자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에 필요한 평가 도구부터 도입하고, 직접 아이들을 검사해 데이터를 모았다. 작은 규모로 시작했던 유전자 연구였지만, 현재는 전장유전체 데이터를 보유하게 되었고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도 개발하며 의미 있는 결과들을 얻고 있다.
“제가 연구자로서 일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즉 저의 당대에 자폐를 이해하고 자폐인을 도울 수 있는 결정적인 성과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닦아 놓은 길을 후학들이 조금 쉽게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발달 장애를 가진 소아 청소년들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다른 질환은 치료를 통해 아픈 상태에서 벗어나면 없었던 일처럼 되지만, 발달 장애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자폐를 갖고 있든 없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방향을 조금만 바꿔줘도 생활이 굉장히 달라지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이렇듯 어릴 때보다 훨씬 더 나아지고 성숙해진 아이들이 감사 인사를 전할 때, ‘이 일을 하기 잘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라는 말하는 것이 굉장히 성숙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들의 ‘감사하다’는 한 마디는 그녀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내가 직접 써내려 가는, 나만의 이야기
유희정 교수는 시그니처란 ‘나의 경험을 쌓고 직조해서 내 삶의 고유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목표로 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없다. 경쟁에서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다. 특히 요즘 시대는 얻지 못하면 안 되고 이기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가진 것은 많은데 불행해하는 이들이 많다.
“제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박탈과 좌절을 자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그니처란 내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쌓여 삶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나 거창한 스토리일 필요는 없습니다.”
유희정 교수는 스토리가 다양하고 촘촘할수록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가 아닌 ‘성악’이라는 또 다른 스토리를 써내려 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음악회에서 독창을 하게 되었고, 이후에 열정적인 아마추어 성악인들을 만나면서 현재는 몇 달에 한 번씩은 합주를 하고 있다.
“요즘엔 바흐나 헨델 같은 바로크 성악곡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이 짜 놓은 음악 안에 빠져 있다 보면, 아름다움의 가치가 시대를 넘어 살아있음에 감동합니다. 하는 일이 많아지고 커리어가 쌓일수록, 작은 일에서 얻는 기쁨의 크기가 작아집니다. 하지만 부캐를 갖는 것은 그 순간을 즐기고 살아가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감정을 증폭된 형태로 표현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녀는 성악을 할 때 ‘평소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쓰는 것’ 같아 더욱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과정을 즐기려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며 <Climb every mountain>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모든 길을 가 보기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