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의학교(醫學校)의 개교 125주년을 맞는 해이다. 의학교는 대한제국 시기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서양 의학을 도입하고 보급하며 근대 의료 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배출된 최초의 우리나라 면허 의사들은 20세기 한국 의학의 초석을 놓았다. 의학교에 앞서 국립 의학 교육 기관으로 ‘제중원의학당(濟衆院醫學堂)’이 있었지만 여러 한계로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고, 3년간의 정식 교육을 통해 의사 양성에 성공한 것은 의학교가 처음이었다.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의대(서울의대)을 개교하였다. 굴곡진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주체적 관립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의 전통을 서울의대가 이어서 발전시키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돌이켜보면 서울의대의 활동은 단순히 양질의 의사를 양성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의학 연구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질병 치료제 개발과 의료 기술 혁신을 이끌었다. 특히 서울의대가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보여준 역량과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제 의학과 의료는 단순한 교육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의학교 125년을 맞이한 지금, 서울의대는 과거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반 정밀의학 등 최신 기술을 의학 교육과 연구에 접목하며 미래 의료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난 역사와 미래에 일관되게 이어지는 서울의대의 정신은 의학 교육의 혁신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하는 것이다.
서울의대는 단순히 125년의 역사를 기억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의학 발전과 교육 혁신에 매진할 것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전인적 의료인을 양성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밝히는 등대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125주년 엠블럼
의학교 개교 125주년을 기념하여 1899년 의학교의 탄생부터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역사와 그 안에 담긴 가치를 전파한다. 그 역사와 가치를 바탕으로 세계로, 미래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의학 교육, 의과학자 양성과 사회공헌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1945–1961

한국 의학의 기틀 마련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빠르게 변화했다. 특히 서울의대는 자체 노력에 더하여 ‘미네소타 프로젝트’라는 커다란 계기를 통해 의학 교육과 의술의 총체적 도약을 이루었다.
미네소타대학과 기술협조협정 체결 후 기념촬영(1954.9.5.)
1. 광복 직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경성의학전문학교의 동향

1945년 8월 15일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한국인 의료진은 자치권을 행사하며 환자 진료에 정성을 다했다. 10월 경성제대 의학부는 경성대학 의학부로 공식 개편되었고, 해방 후 첫 강의를 시작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는 한국인 교수진이 학교를 인수했고, 동문 선배들은 교수진 구성, 학사 운영 등을 도왔으며, 역시 1945년 10월부터 정상적 강의를 시작했다.

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범

미군정의 국립 종합대학 설립 계획에 따라 1946년 10월 경성대학(구 경성제국대학), 9개 관립 전문학교, 1개 사립 전문학교가 하나로 통합되어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했다.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우익 계열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설립에 찬성하고, 좌익 계열은 반대하며 대립했다. 여기에 더하여, 서로의 과거 학제 등이 다른 경성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생 및 교수들 사이에 반목이 있었다.

3. 한국전쟁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1950~1953년 한국전쟁 시기에 서울의대는 더욱 큰 수난을 겪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져갔고, 교수진과 학생들의 일부는 납북되거나 사망했다. 그러나 서울의대는 저력을 발휘했다. 부속병원은 제36육군병원으로 편제되어 부상병 치료에 성과를 올렸고, 의과대학은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운영하여 의학 교육의 맥을 이어갔다.

4. ‘미네소타 프로젝트’

한국전쟁 이후 1954~1961년에 걸쳐 미국 정부는 미네소타 대학을 통하여 서울대학교의 공학, 농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 대한 대규모 교육 원조를 시행했는데, 이것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했고, 교수진과 대학원생들은 연수, 유학을 통해 현대 의술과 미국식 의학 교육을 익혔다. 이로써 서울의대의 교육, 연구, 진료가 총체적으로 향상되었고, 한국 의학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61–1978

의학 연구·교육의 내실화

1961년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종료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교육 및 연구 분야에서 자립적인 발전을 이루며 새로운 의학 교육의 모델이 되었다. 당면한 국내의 보건 문제 해결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으며, 의학 교육의 전문성을 높여갔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1954~1961년 진행되었지만, 차이나 메디컬 보드(CMB)의 지원은 1950~197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지원은 여러 건물의 건립과 교육과정 개편의 초석이 되었기 때문에, 1961년을 겹쳐 표기함으로써 ‘연속성’을 강조했다.
종합실습실과 도서관 전경(1970년대 후반)
1. 차이나 메디컬 보드의 지원과 연구의 활성화

20세기 초기부터 미국 록펠러재단은 중국과 아시아의 건강과 의료혜택 증진을 위한 지원을 차이나 메디컬 보드(CMB) 사업을 통하여 수행하였다. 1960~1970년대에 CMB는 서울의대에도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960년대에는 학술지를 기증하고 실험 장비를 지원했으며, 1970년대에는 교수들의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하여 연구 방법과 교육 방식의 현대화 및 의학도서관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서울의대는 이 기간에 여러 부설 연구소를 설립하고 암, 결핵, 풍토병, 인구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2. 제1차 교육과정 개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1960년대까지 전통적인 ‘교실’에 의한 개별 학문 단위 중심의 교육을 운영했으나, 1970년대부터 통합 교육을 도입했다. 1968년 교과과정 개편을 시작했고, 1971년부터 블록 강의와 선택과목(elective) 제도를 채택했다. 이 교육과정 개편의 핵심은 실습 중심 교육과 임상 의학 교육을 강화하여 학생들이 과목 간 연관성을 이해하고 종합적인 의학 지식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3. 의학교육연수원 설립

1975년 설립된 의학교육연수원은 의학 교육의 질을 향상하고 보건 의료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학, 치의학, 간호학 등의 교육과정을 기획하고 교수들의 연수 및 교육 방법 개선 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기성 의료인들에게 연수 교육을 시행하여 실무 중심의 의학 교육을 실현했다.

4.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 출범과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신축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이 규모, 시설, 인력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면서 운영체제의 개선 문제가 대두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병원 설치법’이 국무회의와 국회를 통과했다. 1978년 7월 15일,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이 출범하여 자율적 성장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10여 년 동안 신축공사를 계속해 온 본관을 1978년에 완공하고 첨단 장비들을 도입하여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1979–1997

한국 의학계에서 선도적 역할 수행

서울의대는 1982년 교육목표를 제정하고 기초 및 임상의학 평가를 도입했으며, 1983년부터 신생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교수 지원과 양성 위탁 교육을 시작했다. 1990년 기초의학연구동을 완공하여 연구 및 교육의 도약을 도모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1985년 어린이병원 개원, 1987년 시립영등포병원(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운영 수탁, 1991년 임상의학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한국 의학계를 선도했다.
기초의학연구동 전경(1990년대)
1. 연구 체계 확립

서울대학교병원은 1978년 본관 신축과 함께 연구 인프라를 확장하고, 연구비 지원 시스템을 도입했다. 1980년대 중반 교수 수와 연구비가 급증함에 따라 서울의대와 서울대학교병원은 연구 환경을 개선했으며, 1990년 기초의학연구동 개관과 1991년 임상의학연구소 설립을 통해 연구 체계를 확립했다.

2. 제2차 교육과정 개편

서울의대는 1981~1998년 제2기 교육과정 개편을 진행했다. 1982년 제정한 교육목표는 의학 연구와 진료 능력을 갖춘 의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995년에는 예과 교육과정 연구를 위한 예과교육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 혁신을 이루었다.

3. 병원의 성장과 교육 역량 강화

서울대학교병원은 1978년 본관 신축 이후 병상과 교육시설을 대폭 확대했다. 강의실과 실습실, 영상 장비와 실습 기자재도 확충했다. 1980년 장기발전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암병동, 심장병동 등 전문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강화했다. 1985년 어린이병원 개원과 1987년 시립영등포병원 수탁 운영으로 학생들에게 다양한 임상 사례를 제공했다. 1989년 임상교수요원 제도를 도입하여 교수 인력을 확충했다.

1998–2015

글로벌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지향

서울의대는 1990년대부터 2015년까지 급격히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교육과 연구에 집중했다. 21세기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서울의대는 국제적 역량을 강화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또한 서울대학교병원의 10년 뒤 모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우수한 진료실적을 넘어서, “교육과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종욱 WHO 사무총장
1. 학생 중심, 인간 중심 교육 지향

서울의대는 1998년 의학교육실을 신설하고, 1999년 문제기반학습(PBL) 도입 준비를 마친 후 2003년부터 시행했다. 학생 중심, 인간 중심의 교육을 지향하는 한편 임상 의학 조기 노출과 실습을 강화했다. 2005년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를 병행하기로 결정, 교육 체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2014년 ‘인류와 사회에 기여할 의학 인재 양성’이라는 새로운 교육목표를 설정했다.

2. SCI 논문 1,000편 시대 개척

서울의대는 1990년대부터 기초의학연구소와 임상의학연구소를 비롯한 연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삼성암연구동, 특수생명자원연구동 등의 건립을 통해 연구 환경을 개선했다. 2005년 서울의대와 서울대학교병원은 1,065편의 SCI 논문을 발표하여 단일기관 SCI 논문 1,000편 시대를 개척했다. 또한 서울의대는 의과학과의 설립을 통해 BT(생명과학) 분야에서 실용적인 연구성과를 창출했다.

3. ‘비전 2017’ 선포

2007년 서울의대는 ‘세계 10대 의과대학’을 목표로 ‘비전 2017’을 선포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5대 전략목표를 제시했다. 조직 혁신, 교육 특화, 협력 연구 등을 포함하여 서울의대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2016–2024

새로운 도약과 성장, 그리고 혁신

서울의대는 2016년 ‘이종욱 교육과정’을 도입하며 다시 한번 큰 변화를 시도했다. 2017년에는 3,000편에 가까운 SCI 논문을 생산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역량을 입증했다. 이제 서울의대는 의학교 개교 125주년을 넘어 새로운 125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도약과 성장, 그리고 혁신을 이루며 한국 국민은 물론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나아갈 것이다.
이종욱 교육과정 선포식(2015.10.2.)
1.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역량 입증

서울의대와 서울대학교병원의 연구성과는 계속 증가했다. 2013년 상위 피인용 논문 수에서 서울의대는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2017년 SCI 논문 편수는 2,979편에 달해 3,000편 시대를 예고했다. 연구비는 1985년 3억 원에서 2017년 723억 원으로 급증했다. 2023년에는 SCI 논문 편수가 3,049편으로 증가했으며, 연구비는 1,071억 원에 달해 다시 한번 그 성과를 입증했다.

2. ‘이종욱 교육과정’ 시행

2016년에 도입한 ‘이종욱 교육과정’은 융합적 교육을 중시하며, 학생들이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해 능동적인 의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였다. 의학 연구와 인성 교육, 리더십, 봉사 정신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구체적으로는 2학년 2학기부터 10주 동안 의학 연구를 진행했다. 2018년에는 본과 2학년 학생이 SC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 새로운 도약과 성장, 그리고 혁신을 향해

서울의대는 80년의 역사 동안 시대의 변화에 맞춰 꾸준히 발전해왔다. 교육과 연구의 혁신을 통해 한국과 국제 사회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서울의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정밀의학, 인공지능 등 최신기술을 의학에 접목, 융합하여 미래 의료의 개척에 힘쓸 것이다. 아울러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전인적 의료인을 양성하여 개인의 육체 및 정신의 건강은 물론 건강한 한국 사회, 건강한 국제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할 것이다.

한국 의학의 선구자
김익남(金益南) 선생

2018년 4월 8일, 김익남 동상 제막식이 서울의대 융합관 양윤선홀에서 열렸다. 김익남은 한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문의학교실 황상익 교수(현재 명예교수)의 오랜 연구 덕분에 그의 업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9년 대한제국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醫學校)’가 문을 열었다. 그 이전에 설립된 제중원의학당은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의학교는 3년간의 정식 교육을 통해 의사를 배출한 첫 기관이었다. 의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송촌 지석영은 교장을 맡았고, 김익남은 교관으로서 36명의 근대식 의사를 양성한 첫 의과대학 교수였다.
김익남은 1870년 서울에서 태어나 20대에 한의사로 활동했다. 1895년 일본 유학 시험에 합격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899년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東京慈惠醫院醫學校)’를 졸업하여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1년 동안 ‘도쿄지케이의원’에서 ‘당직 의원(지금의 인턴, 레지던트)’으로 근무한 뒤 귀국하여 의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2년 19명, 1903년 13명, 1905년 4명 등 국내 최초로 근대식 의사를 양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 한국인 의사였다는 점은 더욱 의미가 깊다.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교준과 유병필은 졸업 후 의학교 교관으로 합류해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익남은 일제의 침탈 속에서 1904년 9월 대한제국 최초의 군의장(군의사령관)이 되어 최초의 근대식 군 병원인 ‘육군위생원’의 원장을 맡았다. 또한 1908년 11월 한국 최초의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를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아 근대 의료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김익남은 한국 근대 의학의 선구자로서 20세기 한국 의료의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

김익남 선생 연보

1870.9.6.

한성 남부 초동에서 아버지 김원선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외아들로 출생

1895.12.27.

게이오의숙 보통과 우등졸업

1899.7.30.

도쿄지케이의원 의학교 졸업

1900.8.2.

도쿄지케이의원 수련을 마치고 귀국하여 의학교 교관 취임

1902.7.4.

의학교 제1회생 19명 졸업 - 김익남이 양성한 국내 최초 근대식 면허 의사

1904.9.23.

육군 3등 군의장으로 임명되어 군부 의무국 과장, 육군위생원 원장 역임

1908.11.15.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설립하고 회장 취임

1919.~1930.

간도 용정에서 의료 활동

1937.4.5.

경성 상왕십리정 263번지에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