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llius in Verba.” 영국 왕립학회의 모토다. 어느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는 뜻으로, 확신보다 의심에서 출발할 때 더 단단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과학의 태도를 상징한다. 연구와 일상 사이에서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문장으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있다.
교내에서는 대학원학사실장으로 의과대학 소관 대학원의 학사를 총괄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에서 연구 윤리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기에,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순간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되뇌며 마음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게 한다.
가장 자주 찾는 회복의 공간은 낙산과 창신동이다. 한양도성 성곽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성벽과 도시의 역사, 봉제 공장의 리듬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자연스레 마음이 가라앉는다. 예술가들의 젊은 시절이 담긴 창신동 골목을 지날 때면, 치열한 삶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 자체가 위로가 된다. 이곳을 걷는 시간은 단순한 산책을 넘어, 공간의 뿌리를 이해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유의 과정이 된다.
연건동 역시 생각이 깊어지는 자리다. 조선 시대 연화방과 건덕방에서 유래한 지명처럼, ‘맑음’과 ‘덕’을 품은 이곳은 지금도 아픔과 치유, 앎과 헌신이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그저 이 장소의 의미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매일의 균형이 조용히 다져진다. 이 시간이 소중하기에, 동료들과 낙산을 함께 걸으며 짧은 휴식을 나누기도 한다. 때로는 복잡한 이야기보다 마음을 공유하는 조용한 걸음이 더 큰 위로가 된다. 누군가의 회복을 돕는 일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면 대학원 제도를 정비하고 규정을 새롭게 마련한 일이 큰 보람으로 남았다. KIRD 객원 교수로 활동하며 인공지능 활용과 학술 건전성을 주제로 강의를 이어갔고, 책을 펴내며 생각을 나눈 시간도 뜻깊었다. 앞으로 서울의대가 한층 더 연구 중심 대학으로 도약하길 바라며, 더 깊고 성찰적인 연구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해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다면 절대 대양을 건널 수 없다.” 회복은 화려한 전환이나 특별한 계기에서 오기보다, 사유에서 비롯해 일상으로 번져가는 조용한 흐름에 가깝다. 필요한 건 결국 작은 용기 하나다. 2026년, 이 길을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회복의 시간을 돌아보면, 멈춰 있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방향을 찾기 위해 더 멀리 걸어 나갔던 시간에 가깝다. 의정 사태로 생긴 한 해의 공백은 막연한 불안 대신 직관적으로 끌리는 일을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해진 길 위에서 잠시 멈춘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넓힌 해였다고 생각한다.
휴학 후 좋은 기회를 얻어 미국 Palo Alto에서 4개월가량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일을 함께했다. 창업자들과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미국에 방문한 피투자사들과 함께 user interview를 하고, 회사 사람들과 투자와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며 배운 태도. 실리콘밸리는 “왜 이걸 해?”라는 질문보다 “재미있는데, 너 멋있다”를 먼저 외치는 곳이었다. 그 자유로움과 열정의 밀도를 가까이서 보며, 결국 나를 움직이는 힘이 ‘직관의 끌림’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깨달았다.
휴학 기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unlearn의 연속이었다. 의대생이라는 정체성에서 잠시 비켜서서 AI agent, F&B와 소비재, SaaS 등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며 창업자들과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반복했다. “What matters most to me?”
작년 의정 사태의 시간은 마음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회복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 끌림이 무모해 보이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것의 가치를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혼란스럽고 힘들 때도 있었다. 나를 믿어준 분들과 우연이 만들어낸 단단한 인연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선이 더 넓어졌다.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그런 ‘우연의 귀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 역시 자연스레 생겨났다.
의정 갈등이 끝난 지금은 의료 현장으로 돌아와, 환자들과 진료실 안에서 잊고 있던 의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끊임없이 다양한 선택지가 보이는데, 실습을 돌며 마음 한편에 자리한 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아 환자들에 대한 기억과 내가 잘하고 재미있는 것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끊임없이 고민 중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 평소 기록해 둔 경험과 생각을 당당하게 공유하는 것. 둘째, 나만의 뾰족함과 originality를 가질 수 있도록 깊게 파고들고 싶은 무언가를 찾는 것. 회복의 시간은 잠시의 멈춤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본질을 다시 찾는 예열이었다. 2025년의 시간 위에서, 다시 한 번 직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용히 가속도를 붙여 보려 한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류한 지 이제 2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부서를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경험은 매일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또렷해진 것은 ‘자기 효능감’이라는 가치였다. 업무와 관계 속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배우는지 감각할 때 비로소 일상은 의미를 갖는다.
일상에서 가장 마음이 흔들리는 건 작은 질서가 무너지는 장면들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줄을 지키지 않은 채 끼어드는 모습을 볼 때면, 당연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씁쓸함이 남는다. ‘그 균열을 어떻게 넘어야 할까?’ 질문이 조용히 마음에 머문다.
그럴 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는 존재는 2021년 가족이 된 반려 고양이다. 보호소에서 골반 골절로 하반신에 붕대를 두르고 있던 작은 생명은, 예상치 못한 회복을 이루어 지금은 집 안을 힘차게 뛰어다닌다. 한 생명의 변화와 회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매일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나에게 회복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힘’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학로의 공연과 연주회, 매일 열리는 다양한 강연들을 통해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쌓아온 진심을 마주할 때, 흐트러졌던 마음의 리듬은 다시 정돈된다. 이곳에서 접하는 다양한 지식과 표현은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소중한 자극이다.
의정 사태 동안 공동체 안의 갈등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서운함도 컸지만, 흔들리지 않고 학업을 이어가는 학생들, 분위기를 바로 세우려는 구성원들을 보며 포기할 수 없었다. 함께 버틴 시간이 결국 나에게도 회복의 기반이 되었다. 학교 밖에서는 통일부 2030 자문단으로 활동하며 납북자·억류자·국군 포로 문제를 알리고 있다. 잊혀가는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의 문제’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겼다. 시민들과 함께 음악을 만든 ‘서로의 별이 되어’ 프로젝트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이다.
2026년에는 공동체 안팎의 갈등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서로의 회복을 향한 시선이 더 따뜻해지기를 바란다. 나 역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덜 무겁게 만드는 존재로 살고 싶다. 회복은 결국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건너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매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