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람이나 아쉬움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의대 증원 논란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과 동맹 휴학입니다. 학생들이 교정을 떠나고 강의실이 비워졌던 시간은 학장으로서 가장 무겁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서울의대는 1년의 공백을 지나 비교적 빠르게 정상화됐고, 학생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보람을 꼽는다면, 임기 초 세웠던 제도적 기반을 실제 변화로 연결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4년에 걸친 통합 6년제 교육 과정의 마무리, 교육공무원 임용령의 발전적 개정, 비전임 임상교원 처우 개선 등은 구성원들의 공감 없이는 어려운 과제였고, 임기 안에 방향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분명합니다.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한국형 HST(Health Sciences & Technology, 하버드의대-MIT 사이의 융합교육프로그램) 모델과 학부 융합 교육 과정은 의정 사태로 1년 이상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연합전공이라는 틀을 마련해둔 만큼, 앞으로 교육 과정이 이 기반 위에서 자연스럽게 확장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대답게, 대학이 중심으로, 모두 함께 멀리”라는 방향성은 학장님의 철학을 상징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임기를 마무리하며 보셨을 때, 이 방향성은 어떻게 실현되었고 무엇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았다고 보십니까?
이 세 가지 방향성은 서울의대가 앞으로 어떤 조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서울의대답게’는 단지 뛰어난 성과를 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서울의대다움’의 요체는 단순한 ‘수월성’이 아니라 ‘리더십’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리더십은 스스로 주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저 기관은 믿을 만하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책무성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대학이 중심으로’라는 말에는, 의료 환경이 병원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도 교육과 연구의 중심은 언제나 대학에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대학 본연의 기능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지점입니다. ‘모두 함께 멀리’는 대학은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출신 학교, 근무지, 성별, 전공 분야, 현재 포지션 등의 여러 가지 차별 요소에 의해 메이저-마이너로 구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대 내부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자는 의미입니다. 변화의 흐름은 분명 시작됐지만, 이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통합 6년제와 의사과학자 양성은 임기 동안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두 과제는 앞으로 서울의대의 미래와 어떻게 연결된다고 보십니까?저는 2022년 학장 임기를 시작하면서 예과 2년을 규정한 고등교육법 시행령의 개정을 추진하였고, 선제적으로 통합 6년제 TF를 구성하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견이 다른 구성원들의 컨센서스를 구하는 과정을 지속하였습니다. 2024년 고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통합 6년제 개발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고, 올해까지 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통합 6년제 교육 과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 학칙 개편까지 마무리 되었고, 의정 사태로 1년이 지연되어 2027년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지난 4년 동안 지난한 과정을 거쳐 새 교육 과정이 시작되게 된 것은 학장으로서 제일 큰 보람이고, 故 신좌섭 교수님과 모든 학내 구성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의사과학자 양성은 서울의대 미래 전략의 핵심입니다. 저는 의사과학자를 면허 기반 연구자에만 한정하지 않고, 의학·기초·공학을 연결해 새로운 의료를 만드는 인재까지 포함된다고 봅니다. 보스턴 HST처럼 학제 간 협력이 이루어질 때 미래가 열립니다. 2023년 유홍림 서울대학교 총장님을 수행하여 보스턴 방문 이후, 추진해 온 서울대학교의 한국형 HST 교육 과정도 김영오 서울공대 학장님과 함께 서울의대-서울공대의 학부 연합전공의 형태로 구체화했으므로, 앞으로 교육 과정이 자연스럽게 확장될 것입니다. 통합 6년제가 도입되면 학생들은 더 이른 시기에 융합적 사고와 과학적 기반을 익히고, 사회적 책무성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임 강대희, 신찬수 학장님의 뜻을 이어 2023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과학자 양성사업단을 출범시키고, 학생-전공의/전일제 대학원생-박사후-신진교수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의사과학자 지원 프로그램인 SPST(SNU-SNUH Physician Scientist)프로그램을 완성하고, 각 단계별 지원 재원을 확보한 것 역시 보람이 있는 기억입니다. 이제는 이 교육 과정과 지원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며 성과를 내는 것이 다음 과제입니다.
학장의 시선으로 돌아본 지난 4년,
그리고 앞으로의 서울의대
제가 늘 강조해 왔던 사회적 책무성이라고 하는 것은 리더십입니다. 저는 리더십의 요체로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포용과 승복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거나, 선의의 경쟁에서 진 사람을 루저 취급하거나, 이긴 사람에게 승복을 하지 못하는 자세는 리더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공감과 소통입니다.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했던 과거에는 ‘나를 따르라’의 카리스마의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지만, 이제는 주변과의 공감과 소통이 체화되어 있는 사람을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의정 사태를 통해 공감의 부재가 얼마나 큰 불신을 낳는지 확인했고, 사회와의 소통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셋째는 희생과 배려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직업 윤리에서 출발했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숭고한 직업이라고 존경을 받습니다. 또한, 몸이 아픈 사람과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희생의 근본입니다. 희생과 배려는 국민의 신뢰를 받는 리더십의 기본입니다. 이 세 가지 가치는 통합 6년제 교육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며, 학생들이 저학년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의정 사태와 정원 확대 논란 속에서 어떤 고민을 가장 깊이 하셨나요? 지금 서울의대가 필요로 하는 ‘회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의정 사태는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겉으로는 빠르게 정상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서로에게 쌓였던 감정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는 앞길이 막막하고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대에서 지키고자 했던 원칙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학생 보호, 둘째, 국민의 신뢰 를 받는 실력 있는 의사·의학자 양성, 셋째, 학사 일정 준수가 그 세 가지입니다. 휴학 승인이나 복귀 시점도 모두 그 원칙 아래에서 판단했습니다.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학사 일정의 원칙을 훼손하는 선택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휴학 승인도 9월 말에 결정해 전체 일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서울의대가 필요로 하는 회복은 결국 이 원칙들 위에서 다시 출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 사이에, 학생 사이에, 교수와 학생 사이에 생긴 보이지 않는 균열을 차분히 메우는 과정이며, 이를 위해 여러 만남과 간담회를 이어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울의대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액티브하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0~30년입니다.
서울의대가 내부적으로 복원해야 할 흐름과 외부적으로 사회와 이어가야 할 연결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의정 갈등은 단순히 정원 확대 논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공공의료가 모두 위기를 겪고 있었고, 정부와 의료계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접근 방식이 달라 충돌이 커졌던 것입니다. 서울의대가 앞으로 사회와 연결되는 지점도 이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수의료의 회복은 단일 정책으로 해결될 수없고, 재정 투입과 사회적 합의라는 두 축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특히 재정 문제는 결국 국민의 세금과 직결되기 때문에, 국민이 의료계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의대가 앞으로 가장 중점적으로 복원해야 할 흐름이 ‘국민의 신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부 회복과 외부 회복이 만나는 지점이며, 서울의대가 앞장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서울의대를 이끌 차세대 리더들, 그리고 서울의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학장으로 보낸 지난 시간은 제게도 적지 않은 무게였습니다. 의정 사태를 지나며 마음의 여유를 거의 돌보지 못했고, 스스로도 “이제는 나도 재활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학장직을 내려놓고 나서는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생활도 조금씩 정돈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며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인생은 짧다.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라.” 우리가 ‘액티브하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0~30년 입니다. 그 시간이 200년이라면 깊이 고민해야겠지만, 실제로는 금세 지나갑니다.그래서 저는 서울의대 학생들 가운데 적어도 20%는 임상의사 밖의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의사과학자, 공공의료, 국제보건, 의료정책, 혹은 전혀 다른 분야라도 좋습니다. 의학은 그 자체로 수많은 진로의 출발점이고, 서울의대 학생들은 그만큼 넓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삶도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그 안에 사회적 가치가 함께 담겨 있다면 더 단단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가는 길이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지 한 번 더 고민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